1. 9월입니다. 이 무렵이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. 대학교 1학년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선배가 해준 이야기입니다. “학교 안에서 여자를 사귀려면 이때쯤이 좋아. 1학기 때 연애를 시작한 애들 중 상당수가 방학 동안 헤어지고 솔로가 되어 돌아오거든.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옆구리는 허전하고 눈높이는 낮지. 어떻게 보면 봄보다 더 여자 꼬시기 좋은 계절이야.” 일리 있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. 그러고 보니 지난 학기에 쌍쌍이 붙어 다니던 아이들이 홀로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캠퍼스를 배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습니다. 세 번째 계절, 즉 가을에 그들은 혼자가 되어있었습니다.
2. 만남의 나이테를 세는 단위로 계절을 꼽는 것은 꽤 적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. 다들 몇백일이니 몇 년이니 하지만, 날(日)은 너무 촘촘한 망이고 해(年)는 너무 무딘 칼입니다. '여섯 계절째인 남자친구가 있어’. 실생활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좀 떨어져 걷고 싶겠지만 글로 써놓고 보니 그럴싸해 보입니다.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이 계절을 타니까요. 소매와 낮과 밤의 길이가 바뀌는 파고를 몇 번이나 같이 넘을 수 있었는지. 사람 사이의 인연을 가늠하는데 썩 괜찮은 척도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.
3. 이번 앨범 타이틀에 꼭 ‘셋’이라는 숫자를 넣고 싶었습니다. 3집이란 것 말고도 ‘셋’이어야 하는 이유는 많았습니다. 세 사람이 만들었다(가을방학 두 사람과 프로듀서 이병훈), 삼각지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주로 녹음했다, 자켓 그림에도 세 가지 소재(바다/하늘/땅, 혹은 두 사람과 새 한 마리)가 담겨있다... 여러 가지 핑계를 댔지만, 사실은 무사히 세 번째 정규작이 나왔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. 음악하는 팀의 시간은 비선형적입니다. 그리고 그 비선형적인 타임라인 위에서 서로 다른 마음을 모아 세 번씩이나 결과물을 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. 이 앨범은 제가 1996년 언니네 이발관 1집으로 데뷔한 이래 20년째 총 4개의 팀으로 음악을 해오면서 멤버 변동 없이 첫 번째로 내는 3집입니다. 지금부터는 가보지 않은 길입니다.
4. 음반은 기존의 가을방학 음악과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내용물이라 생각합니다. 2010년에 1집 음반을 소개하면서 저희는 "계피의 음색, 그리고 그 목소리가 전달하는 노랫말의 내러티브를 살리는 것”이라고 했습니다. 이 생각은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저희가 곡을 만들고, 추리고, 다듬고, 최종적으로 형틀에 넣어 굳히는 과정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가진 원칙이라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. 또 하나 염두에 둔 것은 균형입니다. "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것, 그리고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흥미를 느끼고 시도해보고 싶은 것 사이의 균형”. 이 문구는 2집 소개 글에서 그대로 가져왔습니다. 예전에 했던 이야기들을 뒤집지 않으면서 나이 들어가는 것이 저희의 또 한 가지 자랑입니다.
5. 대학 1학년의 가을, 저는 여자친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. 선배에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. 그리고 그것은 ‘막 헤어진 여자들은 외로움을 타거나 눈높이가 낮다'는 탁상공론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반례이자 제 미숙함에 대한 쓸쓸한 반증이었습니다. 어설펐던 시절 제가 간과했던 것들이 이제는 조금씩 보입니다. 이를테면 세 번째 계절에 혼자인 사람이 기대하는 것은, 적어도 '첫 번째 계절을 같이 보낼 사람' 이상의 무언가일 거란 사실입니다. 약속? 안정? 기본? 그 무언가를 정확히 표현할 단어는 못 찾겠지만, 그것이 적어도 꽤 여러 줄의 나이테를 갖고 있음은 분명합니다. 이 앨범을 듣는 분들이 그 무언가를 느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. 결성 6년째에 들려드리는, 가을방학의 시즌 3입니다.